가수 이장희가 통기타를 들고 환하게 웃고 있다. 사진 조선일보 DB
가수 이장희가 통기타를 들고 환하게 웃고 있다. 사진 조선일보 DB

한국에서 가장 가기 힘든 곳은 울릉도다. 포항, 강릉, 죽도 등지에서 배를 타고 3시간을 가야 한다. 서울을 기준으로 하자면 제주도가 훨씬 멀지만, 한 시간의 비행과 세 시간의 운항은 차원이 다르다. 파도라도 울렁거리는 날에는 생전 처음 겪는 멀미에 고통이 그림자처럼 드리운다. 급변하는 기상 상황에 배가 뜨지 못하면 하루 이틀이 통으로 날아간다. 2010년대를 전후해 제주 여행이나 ‘이민’이 붐을 이뤘던 반면, 울릉도에는 그 흐름이 미치지 못했던 이유일 것이다. 1990년대의 여행서나 지금의 여행 블로그나, 울릉도에 대한 내용은 그래서 크게 달라지지 않았다.

그런 울릉도에 다녀왔다. 새벽 5시 20분 서울역에서 출발하는 KTX를 타고 오전 9시에 포항에서 떠나는 배에 몸을 실었다. 배가 출발하고 얼마 지나지 않아 온몸이 흔들린 탓에 화장실로 기어가 변기 앞에 무릎을 꿇었다. 속을 말끔히 비워내고 난 후 체면이고 뭐고, 바닥에 냅다 드러누웠다. 마치 안마의자에 몸을 맡긴 듯 출렁이는 등을 느끼며 기절하듯 잠들었다 눈을 떴다. 도착 시각이 머지않았다. 처음으로 가는 울릉도는 쉽지 않았다. 날이 화창했음에도 어지간한 해외여행보다 장벽이 높다는 게 느껴졌다. 나름의 고난을 뚫고, 그렇게 저동항에 도착했다. 육지보다 쨍한 햇볕과 함께 우리를 마중나와 있는 노신사의 표정은 날씨만큼이나 맑았다. 이장희였다. 가고 싶었지만 갈 엄두를 내지 못했던 울릉도행 여객선에 몸을 맡겼던 이유가 이 순간을 위해서였다. 일정상 그를 만나러 간 매니지먼트 팀과 동행한 것이다.

부랴부랴 인사를 나누고 식사를 하러 갔다. 항구에서 멀지 않은 물회전문식당. 울릉도의 명소인지 많은 연예인의 사인과 사진이 붙어 있었다. 당연히 이장희의 사진도 있었다. 비워낸 배를 반찬삼았다 치더라도, 오징어를 비롯한 여러 생선과 어우러진 채소와 양념은 순식간에 식도를 블랙홀로 변모시켰다. 양념 한 방울 남기지 않을 기세로 그릇을 비워가는 우리를 보는 이장희의 얼굴은 흐뭇해 보였다. 1947년생 남자라면 보통 손주들을 볼 때 흐뭇한 표정을 짓기 마련이지만, 그런 황혼의 얼굴이 아니었다. 놀러온 친구들에게 지역 맛집을 소개하는 듯한 의기양양이 그의 표정에 있었다.

올해는 이장희가 데뷔 50주년을 맞는 해다. 그가 대중음악계에 처음으로 이름을 올린 앨범은 포크 컴필레이션인 ‘별 밤에 부치는 노래 씨리즈 Vol.5’다. DJ이자 명동 ‘쉘부르’의 운영자였던 이종환이 기획한 이 앨범에서 그는 ‘겨울 이야기’라는 곡을 ‘낭송’했다. 이 노래의 크레디트를 살펴보면 60년대 후반부터 70년대 초반까지, 서울 다운타운에서 놀던 예술계 청년들의 인맥이 그려진다. 이 곡은 일반적인 노래와는 달리 강근식의 기타 연주와 송창식의 허밍 멜로디 그리고 이장희의 낭송으로 이뤄졌다. 곡을 주도한 인물은 이미 고등학교 때 등단, 문학계의 떠오르는 별이었던 작가 최인호다. 최인호는 문단뿐만 아니라 예술계 등 다방면의 인사와 교류하는 마당발이었고, 후일 송창식의 ‘밤눈’을 비롯한 여러 노래의 가사를 맡기도 했다. 기타를 담당한 강근식은 이장희의 앨범에서 세션을 맡은 동방의 빛 멤버였으며, 이장희와는 진작 소공동 살롱 ‘멕시코’에서 만나 친해진 상태였다. 강근식은 이 곡을 시작으로 지금까지도 이장희 곁에서 기타를 연주하고 있다. 데뷔곡에서 그의 주요 인맥들이 형성돼 있던 셈이다. 낭만의 시대였다.


울릉도 주민으로 살아가는 가수 이장희. 울릉도 평리 석봉 아래 ‘울릉천국’을 만들었다. 사진 조선일보 DB
울릉도 주민으로 살아가는 가수 이장희. 울릉도 평리 석봉 아래 ‘울릉천국’을 만들었다. 사진 조선일보 DB

이장희가 스타덤에 오른 때는 ‘그건 너’를 발표한 이후였다. 남진과 나훈아가 라이벌 구도를 형성하며 연예면의 두 주인공 역할을 하고 있던 그해, 1973년의 최대 히트곡은 패티 김의 ‘이별’, 장현의 ‘마른 잎’, 그리고 이장희의 ‘그건 너’였다. 길옥윤이 ‘이별’을, 신중현이 ‘마른 잎’을 만들었지만 ‘그건 너’는 이장희의 자작곡이다. 이 노래는 역시 당대의 인기 포크 그룹이었던 어니언스의 음악과도 다르다. ‘편지’ ‘작은 새’로 대표되는 어니언스가 유미주의적이고도 서구적인, 맑고 세련된 멜로디와 화음을 무기로 내세웠다면 이장희의 노래는 퇴폐적이고 사뭇 어둡기까지 하다. 거기에 강근식과 동방의 빛이 입힌 사운드는 당대 서구 록의 트렌드였던 사이키델릭을 추구했다. 1970년대 청년 문화에서 포크를 대변했던 김민기, 록의 왕이었던 신중현의 중간에 이장희가 있었다. 이듬해에는 최인호의 원작을 바탕으로 한 영화 ‘별들의 고향’이 공전의 히트를 쳤다. ‘그건 너’와 사뭇 다른 달콤한 러브송이자 영화의 주제가인 ‘나 그대에게 모두 드리리’ 또한 그해 최고의 히트곡이었다.

하지만 이장희의 전성기는 짧았다. 1975년 말 시작된 대마초 파동 때문이었다. ‘가요계 정화’를 명분으로 건 유신정권의 만행으로 그는 황금 같은 시기를 날려야 했다. 80년대에 사업을 겸업하며 김완선의 3집을 프로듀싱하기도 했던 그는 80년대 후반 미국으로 건너가 ‘라디오 코리아’를 설립하며 재미교포 언론의 중심에 섰다.

그와 함께 70년대를 구가했던 동료들이 이후에도 방송과 공연으로 같은 세대와 함께 나이 먹어왔다면 이장희는 잊힌 이름이었다. 2011년 초를 강타했던 ‘쎄씨봉 콘서트’까지는. 이 프로그램의 말미에 깜짝 등장한 그는, 그 순간 주인공이나 다름없었다. 이후 ‘무릎팍 도사’에 출연, 자신의 인생역정을 털어놓으며 또 한번 화제에 올랐다. 그가 울릉도에 산다는 사실도 밝혀졌다.

울릉도에서 만난 이장희는 자신의 울릉도 정착기를 들려줬다. 은퇴 후 거주지로 알래스카와 하와이를 염두에 두고 있던 그는 지인의 추천으로 울릉도 여행을 하게 됐다. 1996년, 울릉도가 아직 ‘낙도’로 분류되던 시절이었다. 거기서 그는 알래스카와 하와이의 자연을 모두 봤다. 쉽게 말해 ‘필’이 꽂혔다. 이후 한국에 들어올 때마다 그는 울릉도에 머물곤 했다. 항구에서 멀리 떨어진 양지바른 곳에 땅을 사고 집을 지었다. 그때 지은 단층집은 아직도 손님을 반긴다.

아름답지만 투박하지 않은 울릉도의 자연만큼이나 그에게도 외진 섬에 사는 티가 나지 않는다. 나이키의 멋진 운동화를 신고 애플의 전자 기기를 걸치고, 손님과 함께 와인을 비운다. 표정과 기억력, 목소리 모두 그 나이대의 어른으로 보이지 않는다. 그가 음악계의 중심에서 활동했던 시간은 길지 않지만 대중이 그를 잊지 못했던 이유일 것이다. 그가 홀연히 등장했을 때 순식간에 대중의 눈에 들어왔던 이유이기도 할 것이다. 지치지 않는 울릉의 자연 같은 남자가 그곳에 머문다.


▒ 김작가
대중음악평론가, 일일공일팔 컨텐츠본부장, 한국 대중음악상 선정위원, MBC ‘나는 가수다’, EBS ‘스페이스 공감’ 기획 및 자문 위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