연인간 대화는 구체적이고 상냥하게 시작하면 좋다.
연인간 대화는 구체적이고 상냥하게 시작하면 좋다.

연애를 하다 보면 매번 같은 부분에서 불만을 느끼는 순간이 온다. 상황이 반복되면 문제를 풀어가기보다 지겨움에 미리 지친다. 제풀에 피로해져 관계의 행복을 의심한다. 내 친구 선영은 애인이 일상에 대해 좀 더 세세히 이야기해주기를 바란다. 그녀의 무뚝뚝한 애인과 대화를 이어가려면 그녀는 몇 배의 화젯거리와 질문으로 이야기를 끌어가야만 한다. 대화는 어느 순간 그녀의 너무 많은 질문으로 점철되고 어느 순간 그의 무심함을 향한 투덜거림으로 넘어간다. 애인은 그녀의 불신과 반복되는 패턴에 점점 더 말수를 줄여가고 급기야는 도망가는 태세다. 그녀는 어젯밤도 전화로 내게 불만을 털어놨다.

“무슨 말만 하면 내가 싸우자는 줄 알아. 난 그냥 같은 요구를 자꾸 반복하게 하니까 그게 싫고 속상해서 투덜대는 건데 말이야.”

연인이 서로 이해 못해 지속적으로 싸우는 부분 중 하나는 언어의 온도차를 파악 못해서다. 자라온 환경과 둘러싼 문화, 삶의 습관으로 형성된 차이점이 드러나는 것이다. 선영이 애인에게 하는 말 중 애인이 공격으로 느끼는 것의 대부분은 투덜댐이나 푸념이다. 선영에 따르면, “투덜댄 건 그냥 투덜거림으로 받아들이고 문제가 되는 부분을 고치겠다고 하면 되는 거잖아. 왜 그 말을 자기를 향한 총체적 공격으로 받아들여 비상등 켜고 반응하냐고. 이건 마치, 남성 시각으로 찍은 포르노 보고 흥분했다고 영화 속 여자랑 자고 싶은 거냐고 다그치면 남자들이 황당해 하는 거랑 같은 거 아니니? 그냥 온도가 다른 거잖아, 온도. 왜 그걸 모르지?”


사람마다 다른 언어의 온도

당장은 선영의 흥분을 가라앉히고 그녀의 불만을 차분히 추적해갔다. 시작은 애인 간에 오가는 일상의 질문에서 비롯됐다. 아침마다 문자로 안부를 묻는 애인에게, 어제 무얼 했느냐고 물었다가 그의 무성의한 대답에 선영은 그동안의 불만이 터지고 말았다. 나는 선영에게 말했다. “네가 말한 것처럼 사람마다 언어의 온도차가 다르잖아. 불만으로 터뜨리기 전에 구체적으로 예를 들어 설명해줘 봐. 매뉴얼처럼 말이야.”

그리고 선영이 애인에게 바라는 매뉴얼은 이렇다. 만일 어제는 무얼 했느냐고 물었다면, “어제는 운동 쉬고 술 마셨어”라는 말 대신에, “어제는 비가 와서 친구 A, B와 함께 청담동 이자카야 C에서 사케 좀 마셨어”라고 말해주는 걸 더 좋아한다.

항상 이렇게 따르라는 건 아니다. 첫 이야기의 물꼬를 좀 더 구체적이고 상냥하게 터주면 좋다는 것을 예로 들었을 뿐이다. 대답이 구체적이면 이후의 대화도 훨씬 더 자연스럽고 편안하게 이어질 수 있으니까. 그저 “술 마셨어”라는 말로 대답을 끊어버리면 여기에 대고, 왜, 어디서, 누구와, 어떻게 등을 꼬치꼬치 캐묻게 되는 역할을 하게 된다. 자칫 잘못하면 질문은 취조투가 될 수 있고 이건 그녀 역시 원하는 바가 아니다. 여기서 사소한 친절과 배려가 빛이 난다. 쉽게 잊고 지나가지만, 구체적인 대화와 설명은 힘이 있다. 구체성이 떨어질수록 관계는 멀어진다. 나눌 수 있는 것도 줄어들고 점차 대화의 소재 거리조차 사라진다. 중요하지 않아서 하지 않은 말들이 사실은 중요한 말들이었다. 우리의 삶을 구성하는 대부분이 일상이고 사랑과 연애는 그 일상을 제외하고 이루어지지 않기 때문이다. 오랜만에 만난 친구를 두고 어색해지는 이유는 관계에서 일상과 구체성이 시간과 함께 희석되었기 때문이다. 작은 변화가 모여 큰 변화를 이루는데, 그걸 몇 마디로 설명하기란 뒤늦게는 거의 불가능하다.


상대에 대한 신뢰가 오해 양산하기도

낭만적 사랑과 연애의 신화는 우리를 꿈꾸게 한다. 눈빛만 마주쳐도 이해하고 이해받는 관계를. 생김새가 비슷한 사람이 있듯 기질이나 성격이 잘 맞는 사람이 있기는 하다. 그러나 운명의 클릭 뒤에 무턱대고 자라난 신뢰와 기대는, 보고 싶은 모습만 받아들이게 해서 편협한 오해를 양산하기도 한다. 어느 순간 드러나는 연인의 낯선 이면에 누군가는 배신감을 느끼기도 하고 성마른 분노로 대응하기도 한다. 원인은 상대 탓이라기보다 관계의 게으름 때문이다. 게으름은 구체성이 떠난 자리를 메꾼다.

예를 들어 보자. 아침 일과를 허겁지겁 치르고 멋대로 생략하는 하루가 지속된다면 일주일의 피로는 더 두껍게 쌓인다. 생활의 활력이나 즐거움도 감소된다. 하루의 밀도가 다르게 흘러간다. 삶의 균형은 약간의 변화와 그것을 지탱할 수 있는 탄탄한 일상으로 주어진다. 사람은 격변 속에서도 자신만의 일상과 규칙을 찾아 균형을 잡아낸다. 관계 역시 변화와 일상의 조화가 필요하다. 자극과 안정이 톱니바퀴처럼 잘 맞물려 돌아갈 때 관계는 건강하다.

그리고 안정을 주기 위한 가장 중요한 덕목은 바로 신뢰이다. 신뢰를 주는 것은 구체적인 말과 행동들이다. 상대방을 스스로 초라하거나 치사하게 느끼지 않게 하도록 먼저 말하고 먼저 안심시켜주는 말과 행동들이다. 침묵의 시간이 길어질 때면 미리 양해를 구하는 것도 좋다. 언제 어디서든, 삶의 어느 순간이든, 모든 것을 다 말하고 공유하는 건 불가능하지만, 자신만의 시간과 공간을 지키기 위해서라도 상대를 미리 안심시켜주는 편이 좋다. 이를 위해서는 신뢰가 필요하고 그 신뢰는 구체성을 필요로 한다.

아이를 키울 때도 마찬가지다. 엄마에게 가장 힘든 점은 엄마에게도 필요한 독립된 공간과 시간을 확보하는 일이다. 이를 얻지 않고서는 건강한 엄마 노릇은 불가능하다고 할 수 있다. 함께 있는 시간이 행복하기 위해서는 혼자 있는 시간이 건강해야 한다. 그리고 그 혼자 있음을 건강하게 하는 것은, 분리 불안의 극복이다. 이것은 비단 아이의 문제만은 아니다. 엄마 또한 분리 불안을 겪는다. 항상 곁에 있고 내게 의존하는 아이가 눈앞에 보이지 않을 때 느끼는 것은 해방감과 더불어 아이에 대한 걱정이다. 이후 아이를 다시 마주했을 때 더 심해졌을 아이의 투정과 불만을 대면할 생각에 미리 불안하기도 하다. 연인이나 부부 사이에서도 마찬가지다. 우리는 종종 자신의 분리 불안을 상대 탓으로 돌리며 외면한다. 내가 없으면 아무 것도 못하는 당신, 나를 믿지 못해 불안해하는 당신, 한 말을 또 하고 또 해서 나를 궁지에 몰아넣는 당신. 그러나 생각해 보라. 당신은 미리부터 상대에게 공격받을 태세를 갖추고 있었던 건 아닌가. 그 불안의 원인은 무엇이었을까. 신뢰하지 않거나 신뢰받지 못하리라 짐작해서 그런 건 아닌가.

해결 방법은 있다. 구체적인 말과 행동으로 당신의 삶과 사랑을 파트너에게 예측가능하게 해 주면 된다. 예측가능성은 곧 신뢰도이기도 하다. 잠시 떨어져 있더라도 미지의 세계로 사라져버리는 것이 아니라 곧 돌아와 곁에 있으리라는 믿음이 단단히 자리할 때 관계는 원활하게 유지된다. 100% 예측가능성의 관계로 살아내라는 건 아니다. 약간의 놀람과 기대는 필요하다. 그 역시 관계 내에서 조정해낼 과제이다. 관계는 끊임없는 노력과 협상의 산물이니까. 


▒ 이서희
서울대 법대를 마치고 프랑스로 건너가 영화학교 ESEC 졸업, 파리3대학 영화과 석사 수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