도널드 트럼프 미국 대통령이 2월 5일(현지시각) 미국 워싱턴 하원 본회의장에서 열린 신년 국정연설 도중 청중들로부터 기립박수를 받고 있다. 사진 EPA 연합
도널드 트럼프 미국 대통령이 2월 5일(현지시각) 미국 워싱턴 하원 본회의장에서 열린 신년 국정연설 도중 청중들로부터 기립박수를 받고 있다. 사진 EPA 연합

2월 5일 밤 9시(현지시각) 미국 워싱턴 하원 본회의장에서 열린 도널드 트럼프 미국 대통령의 신년 국정연설(State of the Union)은 2020년 재선 캠페인의 서곡이나 다름없었다. 그는 이날 대선 ‘깜짝 승리’의 원동력이 된 미국 우선주의 세부 원칙을 재천명했다. 그러면서 일자리 창출과 에너지 생산력 증대, 북미자유무역협정(NAFTA)을 대신한 미국·멕시코·캐나다 협정(USMCA) 체결 등 경제 분야 성과를 알리는 데 적잖은 시간을 할애했다. 협상 기한(3월 1일)이 얼마 남지 않은 미·중 무역전쟁과 중국의 ‘첨단기술 도둑질’에 대한 강경 대응 입장을 재확인하고 미국·멕시코 국경장벽의 필요성을 역설하며 지지층 결집에 나섰다.

윌리엄 갈스톤 브루킹스연구소 선임연구원은 이날 연설에 대해 “트럼프 대통령이 이민, 무역, 낙태, 방위 문제를 노동계층과 백인 복음주의 유권자의 지지를 확보하는 수단으로 활용하겠다는 분명한 신호를 보냈다”고 논평했다.

이번 연설에서 트럼프가 보여준 국정운영 방향을 5대 포인트로 정리했다.


포인트 1│정치적 화합 강조
셧다운 재개 가능성 여전

이번 국정연설은 98번의 박수갈채 속에서 82분간 진행됐다. 1시간 20분간 이어진 지난해 국정연설과 비슷했지만 반응은 더 좋았다. 국정연설 직후 CNN이 시행한 여론조사에서는 응답자의 59%가 ‘매우 긍정적’이라고 답했고, ‘다소 긍정적’이라는 반응은 17%에 달했다. 지난해 국정연설 직후 CNN 여론조사에서 ‘매우 긍정적’이라고 답한 비율은 48%였다(‘다소 긍정적’ 22%). 참고로 2010년 버락 오바마 대통령의 첫 국정연설에 대한 CNN 조사에서는 57%의 응답자가 ‘매우 긍정적’이었다고 평했다. TV 중계를 지켜본 시청자는 4680만 명으로 지난해(4580만 명)보다 늘었다.

역대 최장기간 셧다운(연방정부 부분 폐쇄)으로 추락했던 지지율도 반등했다. 미 여론조사기관 라스무센은 11일 트럼프 대통령의 지지율이 52%로, 취임 직후였던 2017년 3월 이후 가장 높게 나왔다고 발표했다. 지지하지 않는다는 응답은 47%였다.

CNN과 워싱턴포스트 등 현지 언론은 트럼프 대통령이 “미국을 위해 수십 년간 이어진 정치적 교착 상태를 끝내고 해결책을 찾자”고 촉구하는 등 정치적 화합을 강조한 것을 긍정적인 반응이 늘어난 원인으로 보고 있다. 하지만 이번 국정연설은 같은 이유로 재선까지 넘어야 할 산이 많다는 것을 확인한 자리이기도 했다.

국정 파트너인 민주당과 주요 사안마다 첨예하게 대립하고 있기 때문이다. 미 의회는 최근 셧다운을 초래한 멕시코 국경장벽 건설 예산에 대해 원칙적으로 합의했다. 하지만 트럼프 대통령이 요구한 57억달러(약 6조4000억원)의 국경장벽 건설 비용 중 13억7500만달러만 반영됐기 때문에 트럼프 대통령이 이를 거부해 셧다운이 재개될 가능성도 있다.


포인트 2│‘강한 미국’에 대한 끝없는 열망
중국·이란에 맞서 동맹 강화

트럼프 대통령 초청으로 이번 국정연설에 참석한 인물 중에는 1944년 6월 6일 프랑스 노르망디 상륙작전에 참여했던 세 명의 노병(조지프 라일리 일병, 어빙 로커 병장, 허먼 자이트치크 하사)과 달에 성조기를 꽂았던 아폴로 11호의 우주 비행사 버즈 올드린이 포함됐다. 트럼프 대통령이 꿈꾸는 ‘강한 미국’을 상징하는 인물들이다. 트럼프 대통령은 연설 모두에 이들을 소개하면서 75년 전 제2차 세계대전에서의 승리와 50년 전 미국의 인류 첫 달 착륙을 언급했다.

제2차 세계대전 중 미국이 거둔 최대의 승리로 평가받는 노르망디 상륙작전에 대해서는 “전제정치로부터 우리 문명을 구한 쾌거였다”고 치하했다. 당시 연합군은 독일 치하에 있던 프랑스 북부 노르망디에 6500여 척의 선박과 1만2000여 대의 비행기를 동원한 사상 최대의 상륙작전을 감행해 성공하며 제2차 세계대전 승리의 발판을 마련했다.

미국과 영국이 주축이 돼 나치 독일 치하의 프랑스를 구했던 과거를 상기시키면서 중국과 이란, 베네수엘라 등 적대 성향 국가들(‘전제정치’로 상징되는)과 싸움에서 동맹국들의 지지를 호소하는 의도도 담긴 것으로 풀이된다.

트럼프 대통령은 이어 아폴로 11호의 달 착륙에 대해 언급하면서 미국이 자유 수호와 과학 발전, 중산층의 삶의 질 향상을 주도했던 20세기의 ‘좋던 시절’을 상기시켰다. 이와 함께 “올해 미국 우주비행사들이 ‘미국산 로켓’을 타고 다시 우주로 갈 것”이라고 강조하기도 했다.


포인트 3│NATO 방위비 1000억달러 증액
한국 방위비 분담금 증액 우려

이날 트럼프 대통령이 ‘적대 국가’로 언급한 나라는 이란이 유일했다. 하지만 중국과 러시아, 베네수엘라에 대해서도 대립각을 세웠다. 그는 이란 정권이 “악행을 한다”고 비난하면서 “이란이 핵무기를 얻지 못하도록 지난해 이란 핵 합의(JCPOA)에서 탈퇴했다”고 설명했다. 베네수엘라의 마두로 대통령을 대신해 야권 지도자인 후안 과이도 국회의장을 임시 대통령으로 공식 인정한다는 발언도 되풀이했으며, 러시아가 중거리핵전력(INF) 조약을 위반했다며 INF 조약 탈퇴 배경을 거듭 밝히기도 했다.

INF는 1987년 로널드 레이건 당시 미국 대통령과 미하일 고르바초프 소련(러시아의 전신) 공산당 서기장이 서명했다. 핵탄두 탑재가 가능한 사거리 500~5500㎞의 중·단거리 탄도미사일과 순항미사일의 생산·실험·배치를 전면 금지하는 내용을 담고 있다.

그런데 트럼프 대통령이 지난해 10월 20일 자신의 트위터를 통해 러시아가 중장거리 미사일 개발로 INF를 위반했다고 주장하며 조약 탈퇴를 선언했다. 이에 대한 후속 조치로 마이크 폼페이오 미국 국무장관은 지난해 12월 4일 러시아가 60일 안에 INF 합의 사항을 이행하지 않을 경우 조약에서 탈퇴하겠다고 최후통첩을 날렸다. 폼페이오 장관이 제시한 시한은 2월 말이다. INF가 폐기되면 각국의 첨단무기 개발 경쟁에 불이 붙으면서 냉전 시대로 돌아갈 수도 있다는 우려의 목소리가 커지고 있다.

INF 탈퇴가 러시아가 아닌 중국을 견제하기 위한 것이라는 의견도 많다. 지난해 국방비 지출이 663억달러로 미국(6110억달러)의 10분의 1에 불과한 데다 서방의 오랜 제재 영향으로 경제 상황이 좋지 않은 러시아가 미국과 군비 경쟁에 나서기는 어렵기 때문이다. 지난해 중국의 국방비는 2280억달러로 미국에 이은 2위였다.

트럼프 대통령은 이날 “시진핑(習近平) 중국 국가주석을 대단히 존경한다”면서도 “중국이 미국의 산업을 표적으로 삼고 지적 재산을 훔치고 미국인의 일자리와 부를 훔치는 시대는 끝났다”고 말해 중국에 대한 압박 수위를 낮추지 않을 뜻을 분명히 밝혔다.

북대서양조약기구(NATO) 동맹국에 대해서는 지난해 ‘안보 무임승차론’을 펼치며 1000억달러의 방위비 증액을 끌어낸 사실을 자랑스럽게 언급했다. 이를 두고 트럼프 대통령이 한국을 포함한 동맹국의 방위비 분담금 인상 계획을 국정과제로 격상시켰다는 분석이 나온다. 올해 한·미 방위비 분담금 협상은 얼마 전 합의에 이르렀지만, 협상 유효 기간이 1년이어서 내년부터 미국이 더 강한 기조로 인상을 요구할 수 있기 때문이다.

트럼프 대통령은 12일 백악관 각료회의에서 “한국이 전화 두어 통으로 방위비 분담금을 5억달러(약 5605억원) 더 내기로 했다”며 “앞으로 수년간에 걸쳐 오를 것”이라고 말한 것으로 알려졌다.


달에 성조기를 꽂았던 아폴로 11호 우주비행사 버즈 올드린이 트럼프 대통령의 소개에 거수경례로 답하고 있다. 사진 AFP 연합
달에 성조기를 꽂았던 아폴로 11호 우주비행사 버즈 올드린이 트럼프 대통령의 소개에 거수경례로 답하고 있다. 사진 AFP 연합

포인트 4│사회주의 강도 높게 비난
대북 외교성과는 재선 지렛대

북한에 대해서는 2월 27~28일 베트남에서 김정은 국방위원장과 2차 미·북 정상회담을 가질 것(이후 하노이로 개최 장소 확정)이라고 공식 확인하는 등 짧게 언급했다. 김정은 국방위원장과 2차 미·북 정상회담 등 대북 외교 성과를 과시했지만, 지난해 6월 싱가포르에서 열린 첫 북미 정상회담 이후 북한 비핵화 관련 의미 있는 진전이 없다는 것은 부담이 될 수밖에 없는 대목이다.

북한의 핵 위협에 대해 ‘최대 압박’을 화두로 제시했지만, 지난해 새해 국정연설에서 북한을 일곱 번이나 언급하며 “어떤 정권도 북한의 잔인한 독재보다 더 자국민을 완전하고 악랄하게 탄압하지 않았다”고 강하게 비난한 것과 대조를 이룬다. 여기에 대해서는 북한 관련 외교 성과를 재선의 지렛대로 삼으려는 의도 때문이라는 의견이 많다. “북한에 억류된 인질들이 돌아왔고 북한의 핵실험은 중단됐으며 15개월 동안 미사일 발사가 없었다”는 자화자찬도 잊지 않았다.

하지만 사회주의에 대해서는 극심한 경제난과 정치적 혼란을 겪고 있는 베네수엘라와 연결 지어 강도 높게 비판했다. 재선의 걸림돌로 떠오른 알렉산드리아 오카시오-코르테스 하원의원(뉴욕)과 엘리자베스 워런 상원의원(매사추세츠), 버니 샌더스 상원의원(버몬트) 등을 견제하고 북한의 비핵화와 시장경제로 이행을 간접적으로 압박하는 이중의 효과를 노린 것으로 보인다.

자신을 ‘민주적 사회주의자(Democratic Socialist)’라고 부르는 오카시오-코르테스 하원의원은 지난 1월 방송 인터뷰에서 최상위 소득계층에 대해 70%의 높은 세율을 적용해야 한다고 주장해 논란을 키웠다. 얼마 전 대선 출마를 선언한 워런 상원의원도 5000만달러 이상 자산 보유자에게 세금 2%를, 10억달러 이상 자산 보유자에게 세금 3%를 부과하자고 제안한 바 있다.

트럼프 대통령은 “니콜라스 마두로 정권의 사회주의 정책이 베네수엘라를 남미의 가장 부유한 나라에서 극심한 가난과 절망의 나라로 전락시켰다”며 “미국에서도 사회주의를 받아들이자는 새로운 요구가 있다는 데 경각심을 느낀다”고 말했다. 이어 “미국은 절대 사회주의 국가가 되지 않을 것”이라고 단언하자 공화당 지지자들은 자리를 박차고 일어나 “USA”를 연호했고, 오카시오-코르테스 하원의원과 샌더스 상원의원의 굳은 표정이 고스란히 카메라에 잡혀 미국 전역에 방송됐다.


포인트 5│보호무역 기조 강화 예고
법인세 인하 약발 다해

트럼프 대통령은 국정연설에서 집권 3년 차를 맞아 보호무역 기조 강화를 예고했다. “놀라운 경제적 성공을 이루기 위해서 수십 년간의 재앙적인 무역 정책을 뒤집는 것이 가장 중요하다”면서 다른 나라가 미국산 제품에 불공정한 관세를 부과할 경우 해당 국가에서 수입하는 동일 품목에 정확하게 같은 비율의 관세를 부과할 수 있도록 하는 ‘호혜무역법(Reciprocal Trade Act)’ 입법화를 촉구했다.

또 장벽을 건설해 국경을 안전하게 지키고, 새로운 이민 시스템을 구축해 미국 내 일자리를 지키겠다는 의지도 분명히 드러냈다. 미국 기업뿐만 아니라 외국 기업에 대한 미국 내 투자 압박이 강해질 것을 유추할 수 있는 대목이다.

하지만 2017년 말부터 이어진 대대적인 법인세 감세 효과가 상당 부분 사라진 상황에서 지속적인 경기 성장을 견인할 새로운 경제 정책에 대한 언급은 없었다. 핵심 대선 공약 중 하나인 대규모 인프라 투자에 대해서도 “공화·민주 양당이 인프라 재건을 위해 힘을 합쳐야 한다”고 원론적으로 되짚었을 뿐이다.

올해 세계 경제의 최대 악재 중 하나인 미·중 무역전쟁 등 핵심 경제 이슈에 대한 구체적인 내용이 포함되지 않았다는 것도 실망스러운 대목이다. 이 때문에 국정연설 직후 열린 6일 뉴욕증권거래소(NYSE)의 주요 3대 지수(다우존스, S&P, 나스닥)가 일제히 하락하기도 했다.

제프리 삭스 컬럼비아대 경제학과 교수는 ‘이코노미조선’과 인터뷰에서 “미국 경제는 경기 회복 사이클의 정점에 올라섰다”며 “기준금리가 계속 인상되면서 법인세 인하 약발도 다해가고 있는 데다 정치권도 극한 대립 양상으로 치닫고 있다”고 걱정했다.


Plus Point

최장 국정연설 기록 보유자는 클린턴

빌 클린턴 전 미국 대통령의 1999년 신년 국정연설 모습. 사진 AP 연합
빌 클린턴 전 미국 대통령의 1999년 신년 국정연설 모습. 사진 AP 연합

미국 대통령은 매년 초 연방 하원의사당에서 상·하원의원들이 참석한 가운데 신년 국정연설을 한다. 국정 전반 상황을 정리하고 정책 방향을 제시하는 것이 주된 의도다. 통상 대통령 취임일인 1월 20일을 전후해 열리지만, 올해 국정연설은 셧다운(연방정부 부분 폐쇄) 장기화 여파로 늦춰졌다. 초기에는 대통령이 의회에 문서를 제출하던 것이 1913년 우드로 윌슨 대통령 때부터 의회 연설로 굳어졌다. TV 중계된 건 1947년 해리 트루먼 대통령이 처음이었다. 트럼프 대통령의 신년 국정연설은 2018년에 이어 이번이 두 번째였다(취임 첫해에는 취임식으로 국정연설을 대신한다). 특히 지난해 11월 중간선거에서 민주당이 하원을 장악한 가운데 이뤄져 큰 관심을 끌었다.

역대 대통령 중 국정연설을 1시간 넘게 진행한 경우는 트럼프 대통령 외에 린든 존슨, 빌 클린턴, 버락 오바마 4명뿐이었다. 최장 시간 연설 기록 1위와 2위 모두 빌 클린턴 전 대통령이 보유하고 있다. 2000년 국정연설의 1시간 28분 49초가 최장 기록이고 1995년 1시간 24분 58초가 두 번째다. 트럼프의 올해 연설은 역대 3위에 해당한다.